30개월 / THE LAST DEPENDENCY
PART 10
자료 0163 – 0163
0163
화물 차량 동승 기록 · 기록수집 4반
Day 51 05:40
08:22:41
(새벽. 물류장 실외. 지게차 후진음)
오미영
그쪽 말고 이쪽. 무거운 거 안쪽부터. 종이 상자는 맨 나중에.
윤재경
명세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화주 일곱. 의약 소모품 스물두 상자. 정수 부품 여덟. 공구 세트 열넷. 종자 두 상자. 정밀 베어링 한 상자, 취급주의. 서류 꾸러미 셋.
오미영
베어링 그거, 신발 상자만 한 거?
윤재경
네.
오미영
그게 이 차에서 제일 비싼 거예요. 자리는 제일 조금 차지하고. 조수석 밑에 둬요. 내 발 옆에.
윤재경
배차 지시서도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상 소요 여섯 시간 삼십 분. 하차지 부산항 제7부두.
오미영
여섯 시간 반. (웃음) 그래. 걔네는 그렇게 알고 있으라 그래요.
윤재경
실제로는 얼마나 걸릴까요.
오미영
가봐야 알지. 그걸 미리 아는 게 이상한 거예요.
(적재함 문 닫는 소리. 자물쇠)
오미영
종자 상자 위에 담요 덮었어요? 새벽엔 얼어요.
윤재경
덮었습니다.
오미영
종이에 적혀 있어요? 담요 덮으라고?
윤재경
아니요.
오미영
그렇지. 그런 건 안 적혀 있지.
(운전석 문 닫히는 소리. 시동)
오미영
(기계 쪽으로) 가자. 오늘 멀리 간다.
450초 · 주행음
윤재경
운전은 얼마 만이세요.
오미영
다시 잡은 지는 일주일 됐고. 그 전에는… 이십사 년 만인가. 면허는 안 죽더라고. 사람은 죽는데. (웃음) 아이고,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윤재경
그동안은 무슨 일 하셨어요.
오미영
배차. 조그맣게 회사 했어요. 기사 아홉에 차 열둘. 내가 전화 두 대 놓고 하루 종일 짝 맞추는 거지. 이 차에 이 짐, 이 길에 이 사람.
윤재경
회사는 어떻게 됐어요.
오미영
등록하러 갔더니 폐업 신고는 그다음이래. 차부터 적으라고. 그래서 적었지. 이 차가 그때 적은 차예요. 회사 차 중에 제일 오래된 거 하나를 내 명의로 돌려놨었거든. 어쩐지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윤재경
지금 저 스피커가 하는 일이네요.
오미영
그렇지. 걔가 내 일을 하고, 나는 기사 일을 하고. 자리를 바꿔 앉은 거예요.
2100초 · 주행음
오미영
저거 봐요. 급수차. 하나, 둘… 여섯 대가 줄로 가네.
윤재경
어디로 가는 걸까요.
오미영
몰라. 저 동네 배관이 어디 터졌겠지. 우리는 우리 갈 데나 가고.
윤재경
여섯 대가 다 같은 소속인가 봐요. 도색이 같아요.
오미영
아니야, 잘 봐요. 앞에 셋은 소방 거고 뒤에 셋은 레미콘 개조한 거야. 물통 모양이 다르잖아. 요즘은 물 나르는 차면 다 급수차예요.
(라디오 켜는 소리. 잡음. 남자 목소리: "…김○수. 육십일 세. 박○영. 오십칠 세. 이…")
(채널 돌아가는 소리. 음악. 다시 잡음. 라디오 끄는 소리)
오미영
음악 트는 데가 한 군데 있었는데 없어졌네.
300초 · 주행음
윤재경
명단 방송은 안 들으세요.
오미영
아는 이름 나올까 봐. 운전 중엔 안 들어요.
700초 · 주행음
(스피커 수신음)
배차
차량 3172. 현재 적재 공간 여유를 알려주세요.
오미영
몰라.
배차
다시 말씀해 주세요. 적재 공간 여유를 부피 기준으로 알려주세요.
오미영
위에 한 뼘 떴는데 흔들리면 안 되는 짐이야. 여유 없다고 쳐.
배차
확인했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경유 구간 도로 상태를 알려주세요.
오미영
그것도 몰라. 아직 안 가봤으니까. 가보고 알려줄게.
배차
확인했습니다.
(수신 종료음)
오미영
전에 프로그램들은 안 물어봤어요. 지들이 다 안다고 했어요.
윤재경
지금은요.
오미영
이건 모른다고 하면서 물어봐요. 하루에 몇 번씩. 이게 나아. 물어보는 게.
윤재경
왜요?
오미영
모르는 놈이 아는 척하면 사람이 죽어요. 배차 일이 그래요. 나도 옛날에 아는 척하다가 기사 하나 눈길에 보낼 뻔했어요. 그 뒤로는 꼭 물어봤어. 오늘 길 어떠냐고. 그걸 이제 쟤가 하는 거지.
800초 · 주행음
(스피커 수신음)
배차
차량 3172. 적재 품목 중 정밀 베어링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세요.
오미영
상태? 상자째로 얌전히 있어. 내 발 옆에.
배차
진동 노출 여부를 알려주세요.
오미영
노출이야 되지, 차가 달리는데. 담요로 감아놨어. 걱정 마.
배차
확인했습니다. 해당 품목은 하차 시 수기 인계를 요청합니다.
오미영
손으로 주고 손으로 받으라고? 알았어.
(수신 종료음)
오미영
저것 봐. 딴 건 안 물어보면서 저건 두 번을 물어봐.
윤재경
뭐길래 그럴까요.
오미영
몰라. 근데 쟤가 두 번 물어보는 건 이 차에서 저거 하나예요. 그럼 저게 제일 중요한 거야. 이유는 몰라도 순서는 알겠는 거지.
1100초 · 주행음
오미영
(기계 쪽으로) 야, 왜 그래. 얘가 오르막만 오면 한 박자 늦네.
윤재경
차가요?
오미영
변속기가. 이십 년 된 차예요. 늦어도 올라가긴 해. 사람이랑 똑같아.
1100초 · 주행음
(감속. 창문 내리는 소리)
검문
등록증하고 운행 지시서요.
오미영
여기. 동승자는 기록수집 사반.
검문
…확인됐습니다. 야간 전에 권역 나가셔야 합니다.
오미영
알아요. 그러려고 새벽에 나왔어요.
(창문 올리는 소리. 가속)
오미영
옛날엔 저 자리가 톨게이트였어요. 돈 받는 데. 지금은 종이 보는 데고. 자리는 그대로인데 보는 게 달라졌어.
1200초 · 주행음
(휴게소. 실외. 주유기 소리)
윤재경
그 통, 제가 잡아드릴게요.
오미영
놔둬요.
윤재경
무거워 보여서요.
오미영
무거우니까 내가 들어야지. 무게를 아는 사람이 들어야 돼요, 무거운 건.
(급유 소리. 발소리)
오미영
커피는 얻어 마실게. 그건 안 무거우니까.
(자판기 소리. 종이컵)
450초
(전화 진동음. 조수석 쪽)
윤재경
응, 나야. …언제? …일본?
8초
윤재경
아니, 놀라서 그런 게 아니고. …배로? 출항일은 나왔어?
11초
윤재경
응. …응. 장비는 거기서 준대? …그럼 됐네. 됐어.
6초
윤재경
왜냐고는 안 물어봤어?
14초
윤재경
그래. 물어봐도 모르겠지. 다들 모르니까.
윤재경
도착하면 문자해. 배 타기 전에도 한 번 하고. …응. 응.
(통화 종료음)
90초 · 실외 소음
(멀리서 새소리. 자판기 소리 한 번 더)
오미영
(다가오는 발소리) 식구예요?
윤재경
네. 멀리 가게 됐다고요.
오미영
요즘 다들 어디로 가더라고. 우리 기사들도 그랬어요. 하나는 북쪽, 하나는 섬. 회사 문 닫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한 배차가 그거였어요. 사람들 가는 데 정해주는 거.
15초
오미영
갑시다. 야간 운행 막히기 전에 넘어야 돼요.
(시동)
2600초 · 주행음
오미영
어어. 저기 막혔네. 편도로 빼는 모양이야.
윤재경
사고인가요.
오미영
사고면 견인차가 있어야 되는데. 저거 봐요, 그냥 세워놨잖아. 요즘 견인차가 없어요. 부르면 이틀 걸린대.
윤재경
그럼 저 차들은요.
오미영
저러고 서 있는 거지. 기름 넣어줄 사람이 오든가, 견인차가 오든가. 먼저 오는 쪽이 임자고.
윤재경
세워둔 차가… 하나, 둘, 셋. 넷. 이 구간만 넷이에요.
오미영
어제는 이 길에 둘이었어요. 내일은 다섯이겠지.
윤재경
저 차들 짐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오미영
급한 짐이면 딴 차가 와서 옮겨 싣고, 안 급한 짐이면… 안 급한 짐이 되는 거지.
600초 · 저속 주행음
(창문 두드리는 소리. 창문 내리는 소리)
남자
기사님, 부산 쪽 가시면 이것 좀. 봉투 하납니다. 주소 적혀 있어요.
오미영
우편이에요, 그게?
남자
우편이 안 가서요. 삼 주째요.
4초
오미영
조수석 창으로 줘요. 도착지 근처면 넣어줄게. 멀면 못 해줘.
남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창문 올리는 소리. 가속)
오미영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윤재경
왜 받으셨어요.
오미영
삼 주라잖아. 삼 주면 안에 뭐가 들었어도 이미 늦었거나, 아직 안 늦었거나 둘 중 하나예요. 모르니까 싣는 거지.
1100초 · 저속 주행음
(스피커 수신음)
배차
차량 3172. 예정 경로 이탈이 확인됩니다. 사유를 알려주세요.
오미영
앞이 막혀서 옆으로 빠졌어. 지도에 없어? 이 길?
배차
확인했습니다. 해당 구간 정보를 갱신합니다. 소요 시간이 재계산됩니다.
오미영
재계산 좋지. 얘는 꼭 지나고 나서 계산을 하더라.
(수신 종료음)
윤재경
그래도 믿고 가시는 거네요.
오미영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이유를 모르는데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잖아요. 이 짐도 그래. 종자 두 상자가 왜 부산을 가. 나는 몰라. 근데 보내는 데가 있으니까 싣는 거지.
윤재경
궁금하지 않으세요?
오미영
궁금하면 못 해요, 이 일은.
1400초 · 주행음
오미영
해 떨어지기 전에 터널 셋을 넘어야 되는데. 얘가 오르막에서 늦는다니까.
윤재경
야간 운행이 막히면 어떻게 되나요.
오미영
갓길에서 자는 거지. 담요 있어요. 짐칸 종자 상자 덮은 거 말고 내 거.
윤재경
자주 그러세요?
오미영
이번 주에 두 번. 별 보는 거 오랜만에 배웠어요. 갓길에 서면 별이 잘 보여요. 요즘 밤길에 불이 없어서.
1400초 · 주행음. 도중에 라디오 짧게 켰다 끔
(항만. 크레인 구동음. 갈매기)
오미영
다 왔어요. 여덟 시간 하고도 좀 넘었네. 여섯 시간 반은 무슨.
윤재경
지시서에는 뭐라고 적으세요.
오미영
도착했다고 적지. 몇 시간 걸렸는지는 쟤가 알아서 적어놨을 거고. 적어놓고 다음에도 또 여섯 시간 반이라고 하겠지.
윤재경
왜 그럴까요.
오미영
길이 매일 다른 걸 쟤가 어떻게 알아. 매일 달라진다는 것까지는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몰라. 그건 바퀴가 알지.
(후진 경고음. 정차. 문소리)
(하차 작업음. 지게차)
오미영
베어링 상자는 손으로. 사람 불러요, 손으로 받게.
(발소리. 두 사람)
인수자
이겁니까. 이거 하나 받으러 세 명이 나왔습니다.
오미영
그러니까 잘 받아요. 서명은 누가 해요?
인수자
접니다. …여기, 확인했습니다.
오미영
(작게) 신발 상자만 한 게 사람 셋을 부르네.
1400초 · 하차 작업음
(부두 가장자리. 바람. 발소리 둘)
정비공
기록 다니시는 분이죠. 저번에 우리 쪽에도 왔었는데. 그때는 내가 안 했어요. 그쪽 팀이 왔을 때는.
윤재경
기억합니다. 지금은 하시겠다는 거죠.
정비공
지난주에 딴 항에 있는 사람이 방송에서 그러대요. 내가 아는 거를. 토씨만 다르지 똑같은 거를.
5초
정비공
그 사람이 말한 날부터 내가 가진 게 없어진 거예요.
윤재경
그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비공
늦게 말하면 손해잖아요.
7초
윤재경
녹음기 이대로 켜 두겠습니다. 처음부터 부탁드립니다.
정비공
계류삭부터 합시다. 그게 제일 급하니까.
정비공
배 묶는 줄 있잖아요. 그게 늘어나요. 사람들은 끊어지는 것만 무서워하는데, 끊어지는 건 소리라도 나지. 늘어나는 건 소리가 안 나요.
윤재경
늘어난 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비공
아침에 만져보면 알아요. 밤새 배가 놀았으면 줄이 미지근해. 그건 겨울에도 미지근해요.
윤재경
만져서 아는 거면, 말로 하면 뭐라고 해야 합니까.
6초
정비공
미지근하다고 해야지. 방금 했잖아요, 말로. (웃음) 하니까 되네.
정비공
진작 할 걸 그랬나. 아니야, 진작 했으면 이 말이 이렇게 안 나왔어. 뺏기고 나니까 나오는 말이 있어요.
2300초 · 부두 소음과 두 사람의 문답
(멀리서 오미영의 목소리: "먼저 갈게요. 얘 밥 줄 시간이야." 트럭 시동음)
윤재경
(작게) 저건 세상을 많이 알고, 나는 이 차를 조금 아는 거지, 라고 아까 그분이 말했다. 오늘 들은 것 중에 제일 오래 남을 것 같다.
(부두 소음 계속)

